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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자연의 품으로, 청산도

잠깐 멈춤. 이제는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그렇다면 서두를 필요 없다.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할 즈음 다시 천천히 떠나면 된다. 푸르른 자연의 품, 청산도라면 근심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맑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큰 창이 있는 카페에 앉아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 봄이 되면 꽃구경을 하고, 여름이면 산과 바다로 휴가를 떠나던 평범한 일상이 그립다. 마침 걷기 좋은 계절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거닐어 본 청산도. 그곳에는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파고드는 상쾌한 바람과 복잡한 머릿속을 말끔히 씻어줄 푸른 하늘 그리고 익숙한 일상을 잠시 놓아둘 풍요한 자연이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여유를 선물하는 슬로시티

청산도까지 가는 길은 제법 험난했다. 서울에서 완도까지 4시간 30분을 꼬박 달려 다시 뱃길로 50여 분을 더 가야 닿을 수 있다. 완도항과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을 잇는 배편은 하루 대여섯 번 운항이 전부다. 전국을 관통하는 고속 열차와 출퇴근길 타는 지하철에 익숙해진 도시 사람에게는 인내가 필요한 여정이다.
청산도는 완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19.7㎞에 자리한 자그마한 섬이다. 섬 전체 규모가 38.4㎢니 제주도에 비하면 50분의 1 정도로 아담하다. 깨끗한 환경 속에서 자연의 먹거리와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도청항에서 시작하는 미항길을 기점으로 서편제길, 화랑포길, 고인돌길, 범바위길, 구들장길, 돌담길, 노을길 등 지역 특색을 살린 슬로길 17곳을 지정해놓았다. 테마가 있는 슬로길을 합한 길이는 42.195㎞로 마라톤 코스와 같다. 하지만 마라톤처럼 서두를 필요는 없다. 천천히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슬로길을 걷다 보면 이곳을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고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 진정한 쉼을 선물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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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좌) 유채꽃으로 가득한 서편제길. 언덕 끝에는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하얀 2층 집이 남아 있다
(우) 서편제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섬 풍경. 황톳빛 길이 구불구불 나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Description

(위) 유채꽃으로 가득한 서편제길. 언덕 끝에는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하얀 2층 집이 남아 있다
(아래) 서편제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섬 풍경. 황톳빛 길이 구불구불 나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늘 푸르른 자연의 동행

많은 이들이 청산도를 찾는 이유는 영화 <서편제>에 나온 명소를 직접 보기 위해서다. <서편제>는 전국을 유랑하는 소리꾼 가족의 여정을 담은 영화다. 특히 영화 속 소리꾼 아버지와 그의 수제자인 딸, 북장단을 맞추는 아들이 ‘진도아리랑’을 흥겹게 부르며 걷는, 우리 영화사에도 길이 남는 명장면인 탄생한 곳이 청산도다. 선창하는 아버지의 소리에 딸 송화가 소리로 화답한다. 아들 동호까지 합세해 북채를 휘두르며 어느새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추는 신명 나는 소리판이 벌어진다. 5분 30초에 걸쳐 롱 테이크로 촬영한 이 장면의 배경이 된 길은 ‘서편제길’로 명명되어 영화의 감동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 추억을 선사한다. 영화뿐 아니라 아름답고 안타까운 기억을 공유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도청항에서 미항길을 따라 10여 분쯤 걷다 보면 어느새 서편제길이다. 얕은 언덕 위로 뻗은 황톳길 옆으로는 아기자기한 돌담이 있고, 돌담 너머에는 샛노란 유채꽃과 푸르른 청보리가 그림 같은 풍광을 선사한다. 멀리 시선을 두면 옥빛과 남색빛이 어우러진 남해가 한눈에 담겨 ‘산빛이 푸른 섬(靑山島)’이라는 이름에 감동을 더한다. 그 푸른빛 아래로 황톳빛 길이 구불구불 나 있고 이름 모를 풀꽃이 어우러져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향기로운 기분이 든다. 서편제길 언덕 끝에는 <봄의 왈츠>를 촬영한 유럽풍 2층 건물 세트장이 남아 있다. ‘바닷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콘셉트의 오픈 세트장에서 내려다보는 청산도 풍광은 반드시 눈맞춤을 해야 할 멋진 뷰 포인트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화랑포길을 따라가다 보면 탁 트인 바다와 섬을 조망할 수 있는 화랑포 전망대에 다다른다. 화랑포(花浪浦)는 파도가 이는 모습이 마치 꽃과 같다고 해서 그리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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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상서마을 돌담길. 마을 전체가 얕은 돌담으로 이뤄져서 운치를 더한다
(우) 호랑이를 닮은 바위를 만날 수 있는 범바위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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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상서마을 돌담길. 마을 전체가 얕은 돌담으로 이뤄져서 운치를 더한다
(아래) 호랑이를 닮은 바위를 만날 수 있는 범바위 전망대

아름다운 문화가 깃든 삶의 길

고인돌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인상적인 읍리에는 청산도의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과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다. 아무리 지체 높은 이라도 이 앞을 지날 때면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뜻의 하마비는, 자연석에 부처를 새겨 넣은 것으로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신앙물 중 하나다.
읍리를 지나 권덕리로 향하면 산 위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 모양을 한 범바위가 보인다. 먼 옛날 청산도에 살던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했는데, 깊은 산속이라 그 소리가 더 큰 메아리로 돌아와 호랑이가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더 신비한 것은 범바위 부근은 강한 자성으로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강한 기운을 충전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기도 하다. 범바위 전망대에 오르니 이곳 역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장관을 이룬다.
마을 곳곳을 걷다 보면 청보리가 한창 초록 물결을 이루는 구들장논을 마주하게 된다. 2014년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에 등재된 구들장논은 이곳 전통의 농업유산으로, 척박한 땅에 구들장처럼 돌을 넓적하게 깔고 그 위에 흙을 부어 만든 것으로, 섬사람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구들장논 인근에는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길을 내 운치를 더하는 상서마을이 있다. 바람이 많은 섬 지방 특유의 건축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돌담은 흙 대신 돌을 이용해 담을 쌓은 것으로, 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어진 역사가 깃든 곳이다.
맑고 푸르른 하늘과 바다, 상쾌한 바람, 섬 사람들의 지혜가 깃든 삶의 방식까지 만나고 돌아오는 길. 천천히 거닌 청산도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일상으로 되돌아가서도 시시때때로 추억할 행복이 이곳, 청산도에 있었다.